2010년 올 해는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꿈에서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이 고통의 사건을 세종실록을 읽다 그 단초를 보여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1434년에도 이미 일본인들이 우리를 침략할 것에 대해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는군요.
하지만 그 고민을 그 당시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기에 국권침탈이라는 치욕을 겪게 된 것인지도...
[세종실록 1434년 세종 16년 8월 5일] "뜰에서 자고 가기를 애걸하는 자가 안방을 꾀한다!"
세종이 말씀하시길,
“허조가 아뢰기를,
‘내이포(乃而浦) 등처에 왜인이 많이 와서 사는데, ........
속담에 이르기를, 「뜰에서 자고 가기를 애걸하는 자가 안방을 꾀한다.」고 하오니,
이제 우리 나라가 융성하게 다스려지는 때를 당하여 왜적의 침노를 족히 염려할 것은 없사오나,
천지의 기운도 오히려 상하고 쇠함이 있고, 제왕(帝王)의 정치도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이 서로 바뀌어지옵나니,
이제 우리 조정이 극히 다스려졌다 할지라도 천년 후에는 오늘과 같지 않을는지를 어찌 아오리까.
후환을 막고자 하면 마땅히 드러나기 전에 이를 도모하소서.’ 하였으니,
내가 허조의 말을 옳다고 여기나, 그 처리할 적당한 방법을 알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가할까.”
황희가 말하기를 "금년에 먼저 김해 읍성을 쌓고 다음에 내이포 현성(縣城)을 쌓아서,
만일 왜적의 변이 있거든 백성들로 하여금 옮겨 들어와서 피난하게 하옵소서.”
어떠신가요?
세종대왕의 걱정에 두 재상이 내 놓는 생각이 정반대이지 않습니까?
지금에 와 돌이켜 보면 누구의 생각이 더 현명한 것이었을까요?
세종대왕은 누구의 손을 들어 주셨어야 할까요???
(세종께서는 '황희의 말대로 하라'란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전 개인적으로 황희를 밀어 주신 것은 마음에 안듭니다...)
*내이포(乃而浦)는 조선시대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통상무역을 하던 곳인 왜관 중 하나입니다.
고려 말 이후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그 회유책으로 삼포(웅천의 내이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를
열어 일본인이 왕래하며 무역할 수 있도록 열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 초가 되면 무역을 하기 위해 왕래하던 일본인들이 아예 그 곳에 눌러 살며 살림을 차리는 경우가 다수 발생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치안 문제가 발생하게 되자 이를 처리하기 위해 세종대왕께서 어전 회의를 열어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모으고 계십니다.
이 중 허조의 말이 눈에 번쩍 들어 오지요?
‘뜰에 자고 가기를 애걸하는 자가 안방을 꾀한다…천년 후에는 오늘과 같지 않을지 어찌 아오리까.’
슬프게도 이 분의 우려처럼 천 년을 가지도 못했습니다...
1434년 이 후 천 년이 지나기도 전인 1910년 한일강제병합의 아픔을 겪게 되어 안방을 내어주게 되었니까요.
‘후환을 막고자 하면 마땅히 드러나기 전에 이를 도모하소서.’ 이 말씀처럼 이 때부터라도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다면
우리의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리고 왜곡돼 버리는 참담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 책에 위대한 인물로 나오는 ‘황희’ 정승!
(청렴강직한 정승으로 알고 계시죠? 사실은 비리 정승으로 아주 이름을 떨친 인물입니다..)의 대책을 잘 보십시오.
‘성을 더 쌓아서 변이 생길 경우 피난하게 하자’란 대책입니다…
지금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있는 책임자가 국가의 안전을 위해 내어 놓는 대책이란 것이 저 정도니…
(뭐...요즘의 위정자들이 내어 놓는 대책이란 것도 황희와 별반 다를게 없지만요...)
황희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저 '피난'이라는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대응만 해왔기에
그런 기나긴 고통을 겪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대마도 역시 조선 초 우리의 관할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세적 관리로 인해
지금은 독도까지 니땅 내땅 하며 싸워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런 ‘피난 심리’가 만들어 낸 비극에 관한 이야기가 또 있더군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하고 숨어서 나오지 않는 우리 백성을 끌어 내기 위한 간계를 꾸밀 때도
조선 사람의 피난심리를 역이용했다고 합니다.
'사창(社倉)의 큰 곳간에 피해 들어가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더니
조선 사람들이 앞다투어 기어 나와 이 곳간을 메웠고 이에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이 불을 질러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아픈 이야기입니다.
거참....
*허조(許租, 1369년(공민왕 18년) ~ 1439년(세종 21년))
세종 때에는 세 번이나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그 후 예조판서, 1438년 우의정, 1439년 좌의정 역임
시호는 문경(文敬).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낮이나 밤이나 경계(警戒)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
조직에서나 역사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인물이고 핵심적 역할을 한 분임에도 이 분의 존재 자체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극히 드뭅니다.
세종 대 유능한 신하들이 꽤 많이 역사 책에 등장 함에도 왜 이분에 대한 존재도 보이지 않는 건지… 안타깝습니다.
역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yes man’ 만 우대해 주는 세상인가 봅니다.
하긴, 국가의 리더도 자신의 의견에 늘 찬성 하는 사람만 곁에 두니
허조에 대한 역사의 홀대는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군요. ^^
광복65주년인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다시 한번 역사를 되돌아 보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실록 속 이야기를 적습니다.
역시 ‘역사는 검증 받은 사실이다’ 란 어느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철저히 공부해야 할 이유겠지요~
‘절실강직’의 대표주자였던 허조 재상의 말을 다시 한 번 돌아 보는 날이 되길 바랍니다.
뜰에서 자고 가기를 애걸하는 자가 안방을 꾀한다고 하니 ,
후환을 막고자 하면 마땅히 드러나기 전에 이를 도모하소서!
-허후, 허조부자 정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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